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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곡

Day 4 To Lugano

Rhapsodist@ 2024. 3. 14. 01:05

유럽에 온지 4일째, 루가노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유럽기차 일등석은 처음인데 상당히 쾌적하다. 학생때 세계각국의 사람들과 다리를 부딪혀가며 가장 싼 칸만 전전하던 걸 생각하면 새삼 진보했다는 것이 기쁘고 안심되었다. 한 칸에 좌석이 8개 밖에 없고, 같이 타는 사람들도 어느정도 상류층 사람들 같아 보여서 모두들 앉아마자 노트북을 꺼내서 일하고 있다. (일하는게 맞는지는 모르지만..) 마음이 상당히 놓인다. 첫째로는 소매치기 걱정을 안하고 마음을 좀 풀고 있어서 그렇고, 국적은 다르지만 내가 속한 집단의 사람들과 비슷한 옷을입고 비슷한 행동(기차에서 일하기..)을 하니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하다.

이번 새벽 rem phase에서는 계속 영어로 진행되는 꿈을 꿨다. Past Lives를 보면  초등학교 4학년때 미국으로 전학간 주인공이 미국에서 미국인과 결혼해서 살면서도 계속 한국어 꿈을 꾸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반대로 3일만에 (한국인 동행이 없으니까) 영어꿈을 꾸니 외국에 사는게 더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계속 영어에 시달리는 꿈을 꾸다가 정신이 들어서 눈을 떴을 때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목은 조금 낫기는 하지만 어제와 마찬가지로 칼칼하고, 여전히 해는 뜨지 않았다. 또 새벽 4시인가? 라는 공포감에 시계를 확인했을때 5:40라는 숫자를 보고 매우 안도했다. 아, 오늘부터 되는구나.

어제는 근교에 위치한 세라발레 아울렛을 다녀왔다. 오전 9시가 되기까지 어디서 나타났는지 360도 방향에서 한두명씩 튀어나오는 아시안들과 함께 이층버스를 탔다. 가는길에 별 생각없이 넋놓고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정도 밀라노시내를 벗어나니 창밖 지평선 끝에 희끄무레 한 것이 보였다. 안경을 쓰고 다시 보니 아무래도 설산 같은 것이었다. 한참을 가도 계속 보이길래 구글맵을 켜고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해보니 아무래도 설산은 몽블랑 아니면 체르마트 같았다. 몇 년 전 저것을 보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다녀왔었는데, 뜬금없이 아울렛 가는 버스 창밖으로 너무나 잘 보이니 황당하기까지하다. 럭셔리 아울렛과 몽블랑은 지향하는 바가 뭔가 상충되지 않은가? 버스에 한가득 실린 아시아인들은 이 아름다운 알프스 설산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직 인터넷 여행 정보사이트 같은 곳에는 올라오지 않았나보다. 아마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그런 정보가 알려졌다면 버스에서 2층 우측 좌석을 미리 확보하기 위해서 한국인간에 쟁탈전이 벌어졌을테니까. 스스로 럭셔리 아울렛에 실려가는 속물아시아인 중 한명이 되어 깡통속에 든 참치가 된 것 같다는 생각따위를 하면서, 아직 눈이 꽤 쌓여있는 몽블랑을 바라보며 리스트의 St.Francis of Assiss preaching to the birds - 빌헬름캠프 -를 들으며 달렸다. 이음악이 풍경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듣고 있었는데, 제목을 보니 아시시의 성프란시스 였다.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지역과 음악은 땔 수가 없나보다. 미국팝을 미국에서 들었을때 묘하게 부족하던 한 조각이 해소된 듯 했던 느낌이 떠올랐다.

가장 속물적인 행위와 그보다 더 높은 정신 수준의 명음악, 수만년지속된 아름다운 자연의 극치가 뒤섞여 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럭셔리 아울렛은 사실상 일반 럭셔리쇼핑보다 더 속물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럭셔리 물건을 사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 행위이다. 첫째로는 미학적인 추구이다. 사실 가장 높은 수준의 디자이너들이 최고급의 원단으로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은 분명하다. 두번째로는 그 돈을 지불하고 이러한 물건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남에게 내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실상 두번째면을 강조하며 굳이 럭셔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어느정도는 경멸하는 태도를 자주 보이지만, 우스꽝스럽게도 나도 사실 어느 정도는 그런 인간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까지는 이런 것을 경멸하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고, 오히려 이런 태도가 보편화되어버려서 럭셔리브랜드 세계소비 1등이라는 명예를 얻기까지 했다. 이렇게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사회적인 분위기에 자유로운 인간이란 존재할까? 어짜피 나는 Korean Korean 이니 어쩔 수 없는거잖아?’ 하면서 스스로 합리화도 하면서 두 시간을 달리니 버스가 어느세 세라발레 아울렛에 도착해서 360도 방향에서 모아온 아시안들을 토해냈다.

이번에는 threshold 를 올려서 정말 마음에 드는게 아니면 그냥 돌아와야지. 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쓰나미처럼 몰려올 물욕의 공격에 방어하는 자세로 임하였으나, 결과는 대패였다.
처음으로는 몽클레어 매장을 갔는데 코앞에서 중국인에게 가장 기본 패딩 사이즈를 빼앗기고 말았다. 괜한 경쟁심이 들어서 직원에게 말하니 내 사이즈를 가져다 주었는데 900유로 정도면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한국에서 10년전부터 너무나 유행한나머지 내 또래의 기혼여자들이 교복같이 입고 다니는 것이고, 내가 그들을 속으로 얼마나 경멸했는지가 떠올라 그냥 내려놓고 미국에 가서도 유용하게 입을 것 같은 블랙 바람막이 하나만을 골랐다. (이 때가 유일하게 공격에 방어한 것일줄이야…) 그리고는 계산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앞에 중국인들이 중국어로 대화를 하며 계산을 하고 있었다. 얼핏들으니 10%를 무슨 종이를 가져와 바코드를 찍고 추가할인을 받는것 같길래, 약간 주저하다가 그들 중 젊은 남자 한 명에게 물어봤다. 의외로 젊은 중국인은 영어를 잘했고, 인포센터에서 10%추가 쿠폰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캐셔에게 다시 내가 인포를 다녀올테니 잠깐 물건을 맡아주겠냐고 말했고, 그러자 캐셔가 귀찮았는지 그냥 10% 추가할인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 금액이 50유로 정도 되었으니.. 우습게도 중국인에게 말을 건 댓가로 50유로나 할인을 받았다. 정말 이탈리아는 재밌는 나라라고 생각하며, 중국인과 대화를 잠깐 나누었다. 중국인이 한국에서도 몽클레어가 인기가 많으냐고 물었다. 중국에서는 대인기라며.. 내가 ‘우리도 그렇다. 이 나라 물건인데 아시아인들만 이렇게 난리니 ridiculous하다고 말하며, 그렇게 말하는 나도 여기와서 사고 있으니 스스로 우스꽝스럽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막상 영어로 자동 번역이 잘 안되어서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중국인은 세마디이상 지속되자 내 영어가 완전 엉망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서둘러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ㅎㅎ

다음으로는 지난번에 사지 못했던 프라다 블랙 백팩이 신버전으로 있었고 마침 내가 당시에 과거에 블랙이 없어서 산 네이비는 낡아 떨어지고 있던 차였다. 또 남자용백팩도 새제품이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마음에 들었는데 남편 생각이 났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을하고 패션을 나보다 더 좋아하면서도 소비를 못하고 있는 남편. 그래서 남편 것도 골랐다. 이미 백팩을 두 개 삼으로써 짐을 들 수 있는 한계가 되어버려서 짐을 맡기려고 인포센터로 갔더니, 아주 사람좋은 표정으로 Sure. 하더니 자. 이제 10유로 주세요. 한다.. 아 공짜 아니에요? 하고 한국인 답게 그냥 내가 들고 다닐게요 하고 나왔다. 그 사람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것이 너 지금 몇 천 유로씩 쓰면서 고작 10유로를 못내냐? 하는 눈빛. 미안. 나 원래 그런 사람이야 ㅠ 완전 속물 멍청이라고! ㅠㅠ

다음으로는 구찌와 버버리를 방문하였는데, 구찌는 별다른게 없었다. 내가 4년 전에 득템했다고 생각한 펌프스가 아직도 있었는데, 신줏단지 모시든 귀하게 신고 다녔는데 알고보니 아울렛전용 구두였던 모양이다. 어쨌든 예쁘게 잘 신었고 편하게 신었으면 됐지. 다른 색도 하나 더 살까? 생각하다가 그냥 참았다.

버버리는 요즘 브랜드 매출에 문제가 있는지 대폭 세일중이었다. 옷은 아울렛가격에서 30%할인이었고 가방은 40%할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인기인데… 아마 우리나라 덕분에 근근히 브랜드 명목을 유지하는게 아닐까.. 아기 옷들도 많았어서 은영이 딸이 생각나 보려고 하다가 참았다. 또 내가 무슨 오지람인가 해서… 지난 인연인데.. 괜히 서글펐다. 우리는 이미 20년도 더 전에 끝난 관계가 아니던가.. 버버리에서 베테랑처럼 보이는 직원이 매우 친근하게 다가와서 사이즈를 계속 찾아주고, 입는동안 기다려주고 하길래 갑자기 이 아주머니가 왜이렇게 낙에게 친절한가 싶었더니(?) 직원들 개인별 매출로 인센티브를 주는 것 같았다. 아, 이런 시스템도 있구나.. 그래서인지 아울렛 매장 답지않게 세상 친절했다. 이제까지 버버리 매장에 올 때마다 베이지색 트렌치는 없었는데 어쩐일인지 길이별로 색상별로 있었고 800 유로 정도에 롱트렌치 코트를 구입할 수 있었다. (버버리는 전부터 짧은 트렌치를 입으면 왠지 더 어정쩡했는데 의외로 롱트렌치를 입어보니 나았다.) 그리고 미국에서 입기 좋을 것 같아서 셔츠원피스도 하나 구입했다. 입어보니 시원하고 괜찮아서, 한국에서도 스타일을 바꾸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나오려는데 스트라이프 무늬의 쇼퍼백이 무려 50만원 정도인 것이다. 아.. 스트라이프는 유행도 지난것 같고 어떻게 보면 촌스러운 것 같아서 내려놓았다가, 그래도 이 가격이면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점심을 먹고 다시 가서 구입했다. 경험상 아울렛에서 내려놓은 물건들은 집에 돌아가서 ‘그 때 그냥 사올 걸..’하고 후회했던게 떠올라서.

점심은 세라발레 아울렛내에 예전에 없던 EATALY 매장이 생겨서 억지로억지로 주문해서(늦게갔더니 직원들이 주문받을 의지가 없었다) 트러플 크림 타그르토리올레를 먹었다. 보기에는 별로 맛이 없어보였는데, 한입 입에 넣으니 행복감이 온몸에 퍼졌다. 면발은 한국에서 먹는것보다 더 쫄깃했고 치즈풍미는 더 좋았고 트러플풍미도 과하지 않고 잘 어울렸다. These Guys know TASTE! 평생 해외여행은 이탈리아로만 올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그리고 그 물건들을 낑낑거리며 지고 이고 호텔로 돌아오는데 소유의 무거움이 새삼 느껴졌다. ‘왜 나는 많이 사서 돈 쓰고 사서 고생인가?’ ‘왜 스스로 우아한 삶의 방식으로 들어서지 못하는가?’
하나하나는 매우 싸게 구입하였지만, 전체를 합하면 굉장한 비용을 쓰고 말았다. 한국에서 근 1년동안 쇼핑을 안했으니, 이정도면 괜찮잖아? 이런 생각도 들고.. 얼마전에 인센티브 받았잖아? 하기도 하고 합리화와 죄책감의 핑퐁을 계속 하고 있다. 정말 바보같지만.

그리고는 저녁내내 짐을 이리싸고 저리싸보았는데, 몇 시간을 고민했지만 답이 안나왔다. 스위스는 택시비가 비싸서 택시도 못 탄다는데 이 짐을 들고 어떻게 호텔까지 갈까? 역앞에 있는 호텔로 예약 안한 것이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일단 가지고 온 캐리어 두개가 넘친다는 문제가 있다. 작은 캐리어와 다 담지 못한 옷은 대강 더스트백에 넣어 호텔에 3일동안 맡겨놓는 것을 요청해볼 참이었다. 다행히 나의 개떡같은 영어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호텔직원이 흔쾌히 짐을 맡아주었다.

이 호텔은 정말이지 직원들이 일을 너무너무 잘해서 내가 말하기 전에 내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것 같다. 마치 단체로 독심술이라도 배운 것만 같다. 예를 들면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주문한 물이 많이 남아서 (큰 유리병) 이걸 어떻게 방에 들고가겠다고 하면 좋을까? 생각했는데, 내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이 유리병 방에 가져갈래? 이렇게 물어보는 식이다. 나 콘서트보러가야되는데 우물쭈물하니까 저기 바로 앞에 내가 택시 잡아놨으니까 타고 가 하면서 택시아저씨한테 행선지까지 말해주기도 했다. 호텔은 오래되어 최신식까지는 아니고 화장실에 하수구 냄새도 어느정도 나지만, 밀라노에 오면 무조건 힐튼으로 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게끔한다. 누가 유럽이 느리다고 했던가? 어디를 가도 직원들이 척척 능동적으로 일을 잘한다. 밀라노 사람들은 한국 사람 못지 않게 오히려 더 일을 잘하는 것 같다. 여기는 우리나라 시스템을 습격한 MZ돌풍이 없는 무풍지대인 것만 같다. 얼마전에 프랑스아이들에게 수학과학같은 기초과목 교육을 강화한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우리는 문과 출신 대통령이 이공계, 의료계를 짓밟고, 수능에 킬러문항을 빼라느니 미적을 빼라느니 이런 뭣도 모르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아마 우리나라는 이제 산업의 쇠락의 길로 들어선 것 같아서 새삼 걱정된다. (고등학교 시절 미적분 쉽고 재미있었는데.. 그걸 왜 빼냐고.. 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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